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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99주년

일제의 폭압과 지배에 항거한 김해의 독립 만세 운동과 의인들

기사내용


총칼과 고문을 뚫고 "대한독립 만세"

   1910년 8월 29일, 일본이 우리나라의 자주 통치권을 강제로 빼앗았다. 일본은 조선을 강점한 뒤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각 분야에서 폭력적인 억압과 수탈을 자행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했다.
   1910년대에 지속적으로 나타난 일본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약탈로 농민을 비롯한 민중의 생활은 크게 악화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의 비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분노와 저항의지로 승화되었다.
   3ㆍ1운동은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저항하며 전 민족이 일어난 항일 독립운동이다. 일제 강점기에 나타난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최초로 일어난 대규모 독립운동이다.
   김해의 의인들도 3ㆍ1운동에 참가했다. 학생과 농민, 유림 등 많은 김해사람들이 수 차례에 걸쳐 일제의 총칼에 굴하지 않고 조선인의 의기를 보였다. 이번호에서는 3ㆍ1운동에 참가한 김해의 의인들을 소개한다.

3ㆍ1운동 학생대표 배동석

   1919년 3월 30일 밤 김해 읍내에서 만세 시위가 처음 시작되었다. 이어 31일과 4월 5일에 하계면(진영시장), 4월 11일에 명지면(명호시장)을 휩쓸었고, 4월 12일에 장유면 무계리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4월 16일에 칠산 이동리의 시위로 이어졌다.
   그 날로 거슬러 올라가 김해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의인들을 만나보자. 김해읍 출신 배동석은 세브란스의전 학생으로 2월 26일 박순천에게 독립선언서를 전달했고,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 대표로 활약했다.
   배동석은 선언문을 가지고 김해로 내려와 임학찬ㆍ배덕수ㆍ송세희 등과 의논하여, 3월 30일 밤 10시 읍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면서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계속 된 만세 운동

   김해 최초 만세 시위는 김해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를 심었으나 일본군에게 배동석ㆍ임학찬ㆍ배덕수ㆍ박덕수 등이 검거 되었다.
   이때 검거를 면한 허병ㆍ송상진이 4월 2일 장날을 이용해 다시 거사 하기로 결의했다.
   3월 31일 허병의 집에서 태극기를 제작하는 한편 4월 1일 밤에 격문을 붙여 동지들을 규합했으며, 의용대도 조직했다. 4월 2일 오후 4시 허병ㆍ김석암ㆍ최계우ㆍ송상진 등은 김해 읍내의 시장에서 군중들을 이끌며 시위를 전개했다.
   일본 경찰은 재향군인을 비롯한 일본인 상인과 불량배들까지 동원해 무자비하게 시위 군중을 탄압했다. 고향 미상의 독신이던 최계우는 주인 허병ㆍ허종식과 함께 의거를 주도한 후 일본 헌병의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다 숨졌다.

10척 장대 대형 태극기

   진영에서는 3월 31일 장날에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농산물의 집산지로 일찍이 식민지 경제 정책의 수탈 대상이었던 진영 농민들의 항일의식은 어느 곳 보다도 강했다.
   김정태는 김성도ㆍ김우현ㆍ김용환 등과 함께 각기 금전을 각출해 10척 장대에 매어 달 대형 태극기와 소형 태극기 그리고 격문을 제작했다. 3월 31일 오후 1시께 장터 근방의 흙다리에 대형 태극기가 10척 장대에서 휘날렸다. 진영 하늘에 휘날리던 대형 태극기와 2천여 명의 시위군중은 일본 경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가장 큰 규모 장유 

   장유면의 만세 운동은 김해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났다.
   김종훤은 고종의 국장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독립선언서를 갖고 귀향했다.
   4월 11일 김승태ㆍ조순규ㆍ이강석ㆍ최현호ㆍ조영우ㆍ조항래 등과 만나 이튿날 무계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군중 동원과 태극기 제작을 분담했다.
   4월 12일 동리사람 50여 명을 동원한 김승태가 태극기를 들고 선두에 서서 무계리 장터로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다른 동리에서도 주동 의사들의 인솔 아래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시위 군중이 모여들어 그 숫자는 3천여 명이나 되었다.
   일본 군경의 무력 진압에 분노한 시위 군중은 헌병주재소를 습격했다. 당황한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김선오ㆍ손명조ㆍ김용이는 현장에서 순국했다. 총탄 아래서도 독립을 외쳤던 의사들은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1919년 3월 1일 이후 전국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의 외침이 울려 퍼졌고, 김해에서도 그 외침은 끊이지 않았다.
   이름이 알려진 의사들도 있지만 태극기를 치마폭에 숨겨 장터까지 운반한 이름 없는 기생과 열일곱 어린 학생 등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많은 김해 사람들의 외침도 모두 기억하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99년 전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모든 분들이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국민들, 김해에서 살고 있는 모든 시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관리자 | 김해시보 제 844 호 | 기사 입력 2018년 03월 12일 (월) 11:01